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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람의 생각, 생각, 생각

부활절에 즈음하여

by 청람지기 2025. 4. 25.








              부활절에 즈음하여





                                  김왕식




이른 봄, 대지의 언 저리에서 아직 겨울이 남은 바람이 불어온다.
그 바람 속에도 분명한 떨림이 있다. 죽음의 침묵을 뚫고 피어오르는 생명의 신음. 부활절은 바로 그 떨림 위에 선 절기다. 무덤이라는 종착지에서 다시 열리는 시작, 끝이라 여긴 절망이 기어코 희망으로 바뀌는 날. 세상의 모든 닫힌 문 앞에서, 그리스도의 빈 무덤은 여전히 열려 있다.

기독교 신앙의 심장은 십자가 위의 고통이 아니라, 그 고통을 딛고 일어난 부활에 있다. 부활이 없다면, 피 흘림은 하나의 비극으로 끝날 것이다. 그러나 사흘 만에 무덤을 비우고 일어나신 그분의 발자취는, 인류의 역사에 단 한 번, 생명이 죽음을 거슬러 선례를 만든 사건이었다. 부활은 단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초자연의 기적이 아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온 사랑이, 다시 가장 높은 곳에서 울려 퍼진 구원의 선율이다.

부활은 슬픔의 구조를 전복하는 서사의 전환이다. 비극이 끝을 맺지 않는 드문 구조, 무대 뒤에서 막이 다시 열리는 반전이다. 골고다 언덕의 피 묻은 나무 위에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겼던 제자들, 여인들, 무심히 지나친 군중들조차도 상상할 수 없었던 반응. 돌무덤이 열리고 천사가 외친다.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그 말은 단순한 부재의 선언이 아니다. ‘여기’가 더 이상 죽음의 자리가 아니라는 선언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죽음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죽음을 통과한 승인의 증거다.

부활절은 그 증거를 지닌 사람들이 ‘다시 사는 법’을 배워가는 날이다. 그리스도인에게 부활은 단순히 예수의 부활만이 아니다. 자신의 어두운 무덤 속에서, 삶의 지하실에서, 불신과 냉소와 무기력의 장막을 뚫고 걸어 나오는 모든 순간이 부활의 또 다른 얼굴이다. 이기심을 딛고 내미는 사랑의 손길, 절망 속에서도 품는 용서의 숨결, 나눌 것 없는 삶에서조차 건네는 따뜻한 떡 한 조각—그 안에 부활이 살아 있다.

부활은 하나님의 정의가 세상 속 불의에 내린 판결이다. 억울하게 죽은 자가 가장 먼저 살아나는 날, 권력과 종교가 합작해 짓눌렀던 생명이 다시 일어서는 날, 그래서 부활은 고통받는 자들의 마지막 희망이 된다. 무덤은 더 이상 종착역이 아니고, 고통은 더 이상 결론이 아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라는 명제는 인간이 만들어낸 어떤 철학도, 이념도 줄 수 없는 구원의 말씀이 된다.

그러니 부활절은 단순한 기념이 아니다. 그것은 매 순간 자신 안의 죽음을 인식하고, 다시 살아내겠다는 결단이다. 뿌리째 흔들리는 삶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부활이 내 안에서 일어나기를 바라는 절실한 기도이다. 우리는 그 기도로 다시 사랑하고, 다시 일어서며, 다시 믿게 된다.

오늘, 들녘의 꽃 한 송이 피는 것을 보며, 무너진 마음 한 구석이 다시 숨을 쉬는 것을 느끼며, 부활의 아침을 맞는다. 무덤 밖에 서서 마리아를 부르던 주님의 음성이, 우리 각자에게도 들려온다.
 “두려워하지 말라.”
그것이 부활이 주는 가장 따뜻한 첫마디다. 죽음이 삶을 이기지 못했듯, 절망도 결코 우리를 삼키지 못하리니.



ㅡ 청람